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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기가 가득하던 그 해의 여름은 붉은색이었다.

 

그를 붉게 물들여가는,

 

진한 색의 여름이었다.

 

***

 

    장훈은 서투른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익숙치 않았다. 그에게 연애는 너무 어려웠다. 고등학생 때는 다가오는 여학생들의 마음에 어떻게 응해야할지 몰라 도망쳤던 그였다. 주변 친구들은 그런 그를 보며 줘도 못 먹는다-고 표현하며 한탄했다. 어쩔 수 없었다. 서투르게 거절하고 나면 그의 귀는 항상 붉게 물들어있었다. 닥쳐- 주변 친구들에게 뱉어대면서도 고백이라는 단어에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그런 나이였고, 또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그가 스무 살이 되었다.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를 설레게 했다. 주변의 들뜬 분위기가 그의 감정을 휘저어놓았다.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고생했던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혔다. 짠-잔이 부딪히며 그의 심장을 흔들었다.

 

  대학교는 고등학교와는 많은 것이 달랐지만 그는 적응해나갔다. 과제에 치이고 어려운 강의에 많은 날을 고생하기도 했지만 학교 근처 술집에서 동기들과 털어넘기곤 했다.  그렇게 그는 서투른 고등학생에서 서투른 대학생이 되었다.

 

 

 

 

 

    하루는 계절에 비해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항상 술자리를 먼저 제안하는 동기놈이 여느 때처럼 술잔 털어넘기는 시늉을 하며 훈에게 제안했다. 원래 더운 날엔 맥주를 마시는 거야- 동기의 익살스러운 말에 어이없다는 듯 굴어도 결국엔 따라나서는 그였다.

 

   그런데 당연히 열려있어야 할 술집이 공사 중이었다. 의아함이 생길 찰나, 안내문에 시선이 갔다.

 

-6월 1일, 플라워 카페 'secret love' 가 오픈합니다!

 

   동기는 네이밍 센스를 비웃고 낄낄대며 다른 술집으로 가자고 이끌었다. 흘긋-훈이 돌아본 시선엔 궁금증이 담겨있었다. 플라워 카페라. 뭐하는 곳일까. 일순간, 훈 옆에 바람이 불었다. 습기를 머금은 더운 바람.

 

 

 

 

 

   훈이 그 카페를 다시 찾은 것은 카페가 오픈하고 얼마 지난 후였다. 별 생각은 없었다. 집 가던 길에, 그냥 우연히 들른 수많은 카페 중 하나. 음료가 맛있으면 계속 찾고, 아니면 말고. 그정도의 생각이었다. 딸랑- 문에 달린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어서오세요-"

 

 밝은 미소와 함께 건네는 높은 톤의 인사. 훈이 가게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그 사람이었다. 분홍빛 원피스를 입은 여자. 플라워 카페라고 했던가. 이 공간이랑 참 어울리는 사람이네. 훈은 생각했다.

 

훈이 평소에 갔던 카페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맛도, 메뉴도. 카페 구석구석에 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만 빼면. 예뻤다. 가게도, 그 분위기도.

 

 훈이 앉은 자리 옆에는 붉은색 꽃이 있었다. 머뭇머뭇 손을 뻗어 꽃에 살짝 댄 그의 손끝은 조심스러웠다.

 

"히비스커스라는 꽃이에요. 예쁘죠?"

 

어느샌가 그의 옆에 다가와 여자는 말을 건넸다. 아아, 네. 그렇게 대답하던 훈은 성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비스켓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서비스라고 말했다. 생긋-웃는 미소가 그의 귀를 붉게 했다.

 

"꽃을 좋아하나 봐요."

 

뭐..네. 훈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왔다. 그가 듣기에도 느낄만큼.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건 뜻밖의 순간이었다. 첫 손님이시죠? 웃으면서 물어본 뒤 그녀는 종이에 스탬프를 찍어 건넸다. 가게에 흔히 건네는 스탬프 종이. 그 오른쪽 위에, 또박또박 선혜라고 적혀있었다. 모르고 다른 사람 걸 준 게 아닌가? 훈은 생각했다. 그의 표정이 읽혔는지 그녀는 말했다.

 

"제 이름이에요. 선혜. 살짝 문제가 있어서 스탬프 종이 물량이 부족해서요. 전 제 이름 좋아하기도 하고."

 

선혜는 살짝 멋쩍음이 섞인 웃음을 살풋-내보였다. 아-네. 훈은 그 외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아, 가게에 두실 거면 밑에 이름 써주시겠어요? 그리고 저 주시면 따로 보관해드려요."

 

장훈. 살짝 흘려쓴 무심한 필체. 선혜에게 종이를 건네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좀전에 '히비스커스'를 다루듯이. 외자에요? 이름 예쁘네. 오늘 하루종일 보였던 저 미소. 선혜가 보이는 미소에 장훈의 귀가 물들었다.

 

 

 

 

 

장훈은 한눈에 반하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흔히 말하는 '자만추'만이 이상적인 연애라고 생각해왔던 그에게 선혜의 존재는 당황스러움 자체였다. 매번 술잔을 기울이던 손에 그 카페 특유의 투박한 머그잔이 익숙해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6월 한 달이 지나가는 동안, 훈은 선혜에게 조금씩 물들어갔다. 웃을 때 눈이 반으로 접히는 모습이나, 가끔 꽃에 물을 줄 때 보이는 집중한 눈초리. 그런 것들이 그의 눈에 하나하나 새겨졌다.

 

"자주 오네요?"

 

"꽃을 좋아해서요"

 

웹소설, 웹툰에서 묘사된 것처럼 특별한 분위기가 흐르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날 밤, 훈의 잠을 방해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카페를 좋아하는 단골 손님 A. 그 정도까지가 자신의 한계라고 장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 오빠 왔어?"

 

"그럼~"

 

자기, 이런 애칭 같은 게 없더라도. 자신에게 보내는 눈빛과 저 사람에게 보내는 눈빛이 다르다는 것쯤은 서투른 그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오 오늘 좀 멋있는데~"

 

"누구 남자친군데 당연하지"

 

이렇게 장난기 어린 다정한 말이 오고갈 때면 훈은 조용히 트레이 보관함에 컵을 올려놓고 카페를 떠나곤 했다. 그들이 과시한 것도, 크게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선혜에게 뻗고 있던 그의 신경은 쓸데없이 너무 많은 정보를 그에게 알려줬다.

 

이런 얘기를 주변 친구들한테 건네면 항상 반응이 같았다. 야, 니가 뭐가 아쉽다고 남친 있는 사람을 보러 가고 난리야. 혹은 여자가 그 사람뿐이냐?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내 옆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선혜말고도 사귈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혜는 한 명뿐이었다.

 

 

 

     여름하면 생각나는 이미지. 내리쬐는 태양빛, 후덥지근한 공기. 그런 것보다도 그 해 여름이 훈에게 갖는 이미지는 분홍빛 가득한 꽃향기, 그리고 가끔씩 느껴지는 눈물 특유의 축축하고 뜨거운 감촉. 그런 것이었다. 가망 없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피부로 느껴질 무렵, 이를 악물고 조용히 우는 날이 점차 많아졌다.

 

  선혜가 웃으며 보내는 눈길에 심장이 덜컹거리기보다 눈이 따가워질 때가 많았고, 설레기보다 씁쓸하다 느낄 때가 많아졌다. 한계였다. '그냥 바라보는 것으로 족해' 이런 말로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꽉 악문 이 사이로 울음이 삼켜졌다. 붉게 물든 귀가 야속했다. 이 와중에.

 

 이후로 훈은 카페에 가지 않았다. 그게 자신에게도, 선혜에게도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훈은 몰랐겠지만 그 무렵 준영이 카페에 찾아오는 빈도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적신호였다. 양쪽 모두에게.

 

 

 

 

 

  훈이 선혜를 만나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후배 공연에 사다줄 꽃다발을 고르려고 대학교 근처 꽃집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어떤 의도도, 생각도 없었다. 아니, 사실 그건 틀린 표현일지 모른다. 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선혜가 생각난 것은 훈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솔직한 반응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 대학가 꽃집으로 그를 이끌었고,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우린 '운명'이라 부른다.

 

"어?"

 

 먼저 알아본 것은 훈이었다. 쪼그려앉아서 꽃을 보고 있던 선혜는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훈도 아는 체하려던 생각은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온 반응이었다.

 

"아..안녕하세요..?"

 

그리고 이건, 선혜의 붉은 눈가와 콧잔등을 본 반응이다. 꽃집에서 어쩌다 마주친 것도 당황스러운데 왜 울고 있을까 이 사람은.

 

 "아, 훈 씨네요? 왜 요즘은 카페 안 왔어요?"

 

 "요즘 좀 바빠서.."

 

애써 밝은 척하려는 떨리는 목소리까지도 선혜다웠다. 왜 울고 있어요? 그 질문이 속에 감돌았다. 하지만 훈이 입을 열었을 땐 다른 말이 나왔다.

 

"카페에 놓을 꽃 찾으시는 거에요?"

 

"아, 네. 스타티스가 시들어버렸거든요. 제가 키우기엔 너무 버거운 꽃이였나봐요."

 

살짝 휜 눈꼬리에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르, 선혜에 뺨에 흘러내렸다.

 

"..히비스커스.. 예쁘던데. 그건 어때요?"

 

훈은 처음에 선혜의 카페에서 히비스커스를 만졌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쭙잖은 짐작도, 배려 없는 궁금증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선혜가 이런 말들로 이 시간을 넘기고 싶다면 그걸로 됐다 싶었다.

 

"..히비스커스..괜찮네요 그거."

 

그리고 보이는 밝은 웃음은 방금 전 눈물을 흘렸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무리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인사를 건네고 서로 만날 일 없이 다시 일상을 보내는 것. 그게 훈과 선혜가 할 일이었다. 그걸 너무 잘 알고 있는 훈은 일어나 꽃집을 나섰다. 그러나,

 

"저기, 훈 씨"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달콤한 순간들은 때로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법이다.

 

"꽃, 추천해준 거 고마워서 그런데. 카페 오실래요? 서비스 드릴게요."

 

 

 

 

 

   카페에서 선혜는 자연스레 함께 테이블에 앉아 푸념인 듯, 울음인 듯 모를 얘기를 꺼내놓았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알고 보니 바람을 피고 있더라. 그런데 오히려 당당하더라. 꽃집을 열 때 경제적 지원을 해줬던 사실을 들먹이면서 너가 해준 게 뭐냐고 그런 소리를 하더라.

 

  누가 봐도 나쁜 놈과의 연애 스토리. 훈이 그 얘기를 듣는 동안 꾹 쥐고 있던 손 안에 손톱자국이 짙게 남았다. 상처처럼.

 

 모든 말을 끝마치고 보이는 선혜의 웃음은 밝진 않았지만, 서글프지도 않았다. 정리한 것 같았다. 아직 마음 속에 흔적은 남아 있겠지만.

 

 훈은 입술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마음 같아선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하고 싶은데, 그럴 사이가 되지 못했다.

 

 

 

  훈은 그 날 이후 매일 같이 카페에 왔다. 주중이건, 주말이건, 공강이 있는 날이건 없는 날이건.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선혜의 눈물도, 상처도 봐버렸다. 훈에겐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가을이다 싶은 어느 날. 카페에, 꽃집에서 사왔던 히비스커스가 정말 예쁘게 훈의 눈에 들어왔다. 정말 예쁘게 컸다.

 

"예쁘죠? 정말 예쁘게 잘 컸어요."

 

선혜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히비스커스가 아닌 자신을 눈에 오롯이 담고. 다정히. 익숙한 눈빛이었다. 그동안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건넸던 그 눈빛.

 

"번호..주실래요?"

 

밝은 톤의 떨리는 목소리. 훈에게 보냈던 눈빛을 거두지 않고 선혜는 조심히 물었다.

 

"..다음번에 올 때 스타티스 한 번 사올게요"

 

선혜가 건네는 핸드폰을 받아들고 훈은 그냥 그렇게 덧붙였다.

 

 

 

*스타티스 - 영원한 사랑

 

*히비스커스- 남몰래 감춰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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