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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어납니다.

 

 

 

 

 선혜가 하얀 장미가 꽂힌 화병을 들고 계단을 오릅니다.

오늘따라 선혜의 기분이 매우 좋아보이네요. 발걸음이 참 가벼워요.

 

 계단 끝에 누가 있길래 그런 걸까요?

 

 [주다영]

 

 이런, 팻말에 이름이 쓰여 있었군요. 재미없게 됐네요.

 

 

 방에 들어갑니다.

 

 방 안의 호화스러운 침대에는, 다영이가 고요하게 잠들어 있습니다.

 

 선혜는, 혹시라도 다영이가 깰까 화병을 조용히 내려놓습니다.

 

 투명한 화병에는, 무색의 물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색이 어떻게 변할진 아무도 몰라요. 선혜의 방에는 색색의 물감들이 가득하거든요.

 

 

 

 다영이가 깨어났어요! 어라, 이상하게 방금 깬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하네요.

그런데 조금 피곤해보여 걱정이에요.

 다시 보니... 

 

 피곤한 게 맞았던 모양이에요. 눈을 감더니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네요. 이불이 떨려요.

 

 

 다영이가 자리에 눕는 동시에, 선혜가 다시 들어왔어요. 

 

 선혜는 다영이의 머리맡으로 걸어왔어요. 그리고는 다영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네요.

 

 

 선혜는 화병 속 물을 갈아줍니다.

장미는 아직 채 피지 않았어요.

 

 

 

 오늘은 다영이가 일어난 채로 선혜를 맞이하네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악몽을 꿨나 봐요. 제대로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하는 다영이를 선혜가 부축해주고 있어요.

다영이의 몸이 떨리네요.

 

 선혜는 다영이의 이마를 톡톡 닦아줍니다. 그리곤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어요.

다영이는 여전히 떨고 있어요.

 

  다영이를 다시 자리에 눕힌 선혜는, 창가로 다가갑니다.

그리고는 화병에 분홍색 물감을 떨어뜨려요.

 

 며칠 후 꽃잎이 홍조를 띄자, 선혜는 꽃잎 하나를 따 다영이에게 선물합니다.

다영이는 힘없이 그대로 꽃잎을 받아들어요.

 

 

 

 

 

 다영이가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고 있어요. 너무나 아파보이는 다영이의 모습에 선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요. 몸에 힘이 다 빠질 정도로 울며 다영이의 곁을 떠나질 않아요.

 

 다영이가 처음 아팠던 날부터 한 송이씩 가지고 왔던 안개꽃은 어느새 장미의 곁을 가득 둘러쌌습니다.

이제 장미는 완전히 분홍빛을 띄어요.

 

 

 

 

 

 다영이가 점점 낫고 있어요.

 

 선혜는 기쁜 마음에 장미에게 새로운 색을 선사해주었답니다.

 

 이제 화병의 물은 붉어졌어요.

꽃도 붉어져요.

 

 

 

 

 

 

 

 

 오늘은 기쁜 날이에요! 다영이의 생일인 데다가, 다영이가 완전히 나았거든요! 

 

 

 요즘 항상 안색이 좋지 않던 다영이지만, 오늘만큼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웃고 있네요.

 

 

 장미도 다영이를 축하해주는지, 새빨간 꽃잎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어요. 꽃잎은 활짝 피어 아주 볼 만해요.

 

 

 

 선혜는 싱글벙글 웃으며 새로운 장미 한 송이를 화병에 꽂아요. 어머, 백장미로 착각할 정도로 희미한 푸른색이네요.

곧 붉은 물과 만나 보랏빛을 띨 것만 같아요.

 

 

 

 

 

 새로 꽂혔던 장미가 드디어 보라색이 되었어요! 선혜가 너무 예쁘다며 좋아하지만, 다영이는 어딘가 슬퍼 보이네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 장미를 향해 뻗고 있어요.

 

 

 다영이는 어릴 때부터 꽃을 좋아했는데, 뭔가 아는 걸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방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침대는 마구 어질러져 있고, 책상에는 곳곳에 흠이 났네요. 베개에서 터져나온 솜이 곳곳에 널려 있어요. 몇 뭉치는 화병의 물에 닿았는지 붉게 물들어 있네요. 

 

 어라, 이제 보니 다영이가 방에 없어요. 계단 아래로 찍혀 있는 맨발의 발자국을 보니, 내려갔나 봐요. 내려가다 몇 번 넘어졌는지 쓸린 자국도 있네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앗, 선혜는 다영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봐요. 다행이네요. 손에 다영이의 팔찌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지금까지 다영이와 있었나 봐요.

 

 그런데 다영이는 어디에 두고 혼자인 걸까요?

 

 이제 보니 선혜의 표정이 오묘하네요. 어두우면서도 웃고 있어요.

물감 통을 쥔 손은 빨개져서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요.

 

 선혜가 방으로 올라오네요. 화병에 검은 물감을 넣어요.

물이 탁해졌어요. 새빨간 장미에 일순간 검은 기운이 감돕니다.

 

 

 

 

 

 

 

 오랫동안 다영이가 방에 돌아오질 않아요. 온통 흐뜨려진 방은 치워지지도 않고 아직도 그대로예요. 다영이가 창밖을 보기 위해 매일같이 붙잡던 창살에는 먼지가 꼈어요.

 

 방의 주인도 모르는 새 검붉어지던 장미는 어느새 져버렸네요.

 

 

 꽃이 떨어집니다.

 

 이제 화병에는 로즈힙만이 남았어요.

 

 꽃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이제야

 

 선혜의 꽃은

 

 비로소 피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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